불협화음은 왜 불편하게 들리는가

피아노에서 바로 옆의 두 건반을 동시에 누르면 많은 사람이 흠칫한다. 왜 그 소리가 불편하냐고 물으면 대개 이렇게 답한다. 음이 안 맞아서. 주파수 비율이 복잡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건 답을 한 걸음 미룬 것에 가깝다. 비율이 복잡한 게 왜 하필 불편함으로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불편함은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같은 소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별로 개의치 않고, 실제 음악에서는 그런 화음이 표정을 만드는 데 흔히 쓰인다.
이 질문을 파고들다 알게 된 건, “불협화음이 싫다”는 한마디가 사실은 서로 다른 세 겹을 뭉쳐 부른 말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귀가 물리적으로 느끼는 거칠기, 둘째는 두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느낌, 셋째는 그 둘을 “싫다”로 연결하는 취향이다. 앞의 두 겹은 귀와 뇌의 작동이라 사람 사이에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지막 겹은 사정이 다르다. 이 글은 그 세 겹을 하나씩 벗겨보려는 시도다.
첫째 겹 — 귀가 느끼는 거칠기
두 주파수가 가까이 있으면 맥놀이가 생긴다. 200Hz와 205Hz를 동시에 울리면, 두 파형이 어떤 순간엔 마루끼리 겹쳐 커지고 어떤 순간엔 서로 엇갈려 작아진다. 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흔들림이 초당 다섯 번 반복된다. 두 주파수의 차이인 5Hz만큼.
여기서 흔들림의 속도가 중요하다. 차이가 아주 작아 흔들림이 느리면, 우리는 그걸 하나의 소리가 부드럽게 출렁이는 것으로 듣는다. 불쾌하지 않다. 그런데 차이가 어느 정도 커져 흔들림이 빨라지면, 귀는 개별 출렁임을 하나하나 따라가지 못하고 그 빠른 진동을 하나의 질감으로 뭉쳐 듣는다. 이 질감이 우리가 거칠다, 까슬하다고 느끼는 감각이다. 심리음향에서는 이걸 거칠기(roughness)라고 부른다.
차이를 더 벌리면 어떻게 될까. 계속 거칠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두 주파수가 충분히 멀어지면 귀 안의 주파수 분석기가 둘을 따로 갈라내고, 그러면 거칠기가 옅어진다. 귀에는 인접한 주파수를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처리하는 대역폭이 있는데, 이걸 임계대역(critical band)이라고 한다. 두 소리가 이 대역 안에서 겹칠 때 거칠고, 대역을 넉넉히 벗어나면 잦아든다. 다만 이 대역은 벽처럼 딱 떨어지는 경계가 아니라 주파수에 따라 폭이 달라지고 서로 겹치기도 하니, “이 선을 넘으면 조용해진다”는 식으로 잘라 생각할 건 아니다.
1960년대에 플롬프와 레벨트라는 두 연구자가 두 순음, 그러니까 배음이 없는 맑은 소리 한 쌍을 가지고 이 관계를 재봤다. 거칠기는 두 주파수의 차이가 당시 추정한 임계대역폭의 4분의 1쯤일 때 가장 심했다. 너무 가까우면 느린 출렁임, 너무 멀면 갈라진 두 음, 그 사이 좁은 구간에서만 가장 거칠었다. 이건 순음으로 얻은 대략의 규칙이고 실제 악기 소리는 배음이 여럿 얽혀 더 복잡하지만, 거칠기가 음정의 이름보다 주파수가 부딪히는 간격에서 온다는 큰 그림은 여기서 나온다.
둘째 겹 — 두 소리가 합쳐지지 않는다는 느낌
거칠기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두 음이 임계대역을 한참 벗어나 거칠기가 거의 없는데도 어딘가 안 어울리게 들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까 접어둔 정수비가 다시 나온다.
악기 소리는 기본음 하나로만 되어 있지 않다. 그 위에 정수배에 가깝게 쌓인 배음들이 함께 울린다. 두 음의 주파수가 2대 1이나 3대 2 같은 단순한 비를 이루면, 두 소리의 배음이 상당수 같은 자리에 포개진다. 겹치는 배음이 많으면 뇌는 둘을 따로 있는 두 소리가 아니라 잘 맞물린 하나의 소리처럼 받아들인다. 이걸 융합(fusion)이라고 한다. 반대로 비가 복잡하면 겹치는 배음이 적어, 둘은 끝내 하나로 합쳐지지 않고 서로 겉도는 두 소리로 남는다.
그러니 정수비는 협화음에 붙은 이름표만은 아니었다. 배음이 얼마나 포개져 두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느냐를 가리키는 지표였다. 피타고라스가 관찰한 단순한 비율은 몇천 년 뒤에야 배음의 언어로 다시 설명된 셈이다. 다만 짚어둘 게 있다. 융합은 공기 중의 물리 현상이 아니라 뇌가 내리는 지각의 결과다. 그리고 합쳐지느냐 겉도느냐를 “듣는” 것과, 그중 하나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직 다른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째 겹이 갈라져 나온다.
셋째 겹 — 싫어하도록 배운 것 · 아마존의 실험
앞의 두 겹은 귀와 뇌의 작동이다. 그렇다면 불편함도 거기서 자동으로 따라 나올까. 이 그림을 흔드는 실험이 있다.
2016년, 한 연구팀이 볼리비아 아마존의 치마네족 마을을 찾아갔다. 서양 음악에 거의 노출된 적 없는 참가자들이다. 이들에게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들려주고 얼마나 듣기 좋은지 물었더니, 둘을 거의 비슷하게 평가했다. 우리가 흠칫하는 그 화음을 이들은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같은 실험에서 도시에 사는 볼리비아 사람은 협화음을 더 좋아했고, 미국인은 그 선호가 더 강했다. 서양 음악에 익숙한 집단일수록 협화음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같은 연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치마네족 참가자도 거친 소리, 그러니까 빠른 맥놀이가 만드는 그 까슬한 질감은 덜 좋아했다. 화음의 어울림에는 무덤덤하면서도 거칠기는 피한 것이다. 이건 화음의 차이를 못 들어서가 아니다. 어울림과 거칠기를 감지하는 것과, 그중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서로 다른 층이라는 뜻이다. 좋다 싫다는 감지 위에 따로 얹히는 판단이고, 그 판단이 어떤 음악을 들으며 자랐는지에 크게 기댄다.
한 사회의 결과 하나로 인간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실험은 적어도 협화음 선호가 귀의 구조에서 곧장 나오는 게 아니라 상당 부분 익힌 것일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서양 음악에서 3도가 협화음 대접을 받게 된 게 비교적 최근이라는 사실도 같은 방향의 방증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 자체가 증거는 아니지만, 어떤 소리를 편안하게 여기는지가 시대와 문화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세 겹으로 갈라 읽기
그래서 “불협화음이 불편하다”를 정확히 옮기면 세 문장이 된다. 소리가 거칠어서 불편하다. 두 소리가 합쳐지지 않아 겉돌게 들린다. 그리고 그 겉돎을 나는 싫어하도록 배웠다. 앞의 둘은 귀와 뇌가 대체로 비슷하게 처리하는 감각과 지각이고, 마지막 하나가 사람마다, 문화마다 다르게 칠해지는 자리다.
우리는 이 세 문장을 늘 붙여 말한다. 옆 건반을 눌렀을 때의 그 느낌 안에는 거칠기와 겉돎과 학습된 취향이 겹쳐 있어서, 하나의 불쾌함처럼 뭉쳐 온다. 하지만 다른 음악을 들으며 자란 귀에는 그 겹침이 다르게 배치된다. 불협화음이 절대적으로 불편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 그중 어디까지가 귀고 어디부터가 습관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나에게는 이게 이 주제에서 가장 오래 남은 대목이었다.
여백 — 재즈를 못 듣겠다는 사람을 종종 본다. 코드가 복잡해서, 자꾸 어긋난 소리가 나서 불편하다고. 이 글을 쓰고 나서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듣게 됐다. 그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아직 그 어긋남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뿐이다. 거칠기는 물리라 바뀌지 않지만, 불쾌함은 학습이라 몇 번 더 들으면 옅어진다. 학습된 취향은 다시 학습된다는 게, 나에게는 이 주제에서 가장 희망적인 대목이었다.
참고 — 심리음향 쪽으로 파고들게 한 영상 「불협화음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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